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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유난히 활기를 띠는 곳이 있습니다. 화성의 궁평항입니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항구의 수조마다 꽃게가 가득 차오르고 사람들의 손길 역시 바빠집니다. 이곳에서 언제나 함께 움직이며 하루를 여는 부부가 있습니다. 꽃게를 다루는 이봉원 씨, 그리고 그의 오랜 동반자인 아내 정점옥 씨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인생의 굴곡 끝에서 바다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은 부부입니다.
정점옥 씨는 경남 함양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바다는 눈으로만 바라보는 풍경일 뿐, 그 속에서 삶을 꾸려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외환 위기의 파도가 닥쳤고, 남편의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생계를 다시 일으켜야 했던 부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화성으로 향했고, 삶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배에 오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낯설고 거친 바다였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바닷일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습니다. 지친 몸으로 그물을 당기고, 비바람 속에서 버티며, 생명을 건 듯한 긴장과 싸워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갑작스러운 파도에 휩쓸려 그물에 걸린 채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갈 뻔하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부주의가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세계였기에, 그 순간은 두 사람 모두의 가슴에 깊은 상처처럼 남았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 봉원 씨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내가 더 버텨야 한다.’ 아내가 겪은 두려움까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점옥 씨 역시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습니다. 남편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버틴 시간들은 어느새 부부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습니다. 봉원 씨는 묵묵히 경험을 쌓아 선장이 되었고, 점옥 씨는 항구에서 어물상을 운영하는 든든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바다가 두 사람에게 내준 기회였고, 그 기회를 붙잡은 것은 서로를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궁평항 사람들은 이 부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거친 환경을 견디며 하루하루 자신들의 터전을 일군 부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특히 점옥 씨는 함양에서 왔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이제 누구보다 능숙하게 항구를 지키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만 되면 그녀의 손길은 더 빨라지고, 선박에서 내리는 어획물을 재빠르게 확인하며 하루의 장사를 준비합니다. 생계의 터전이자 남편이 나서는 항구를 한순간도 헛되이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이 늘 단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출항하는 날이면 마음 한쪽은 늘 조용한 불안으로 흔들렸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무섭고, 남편이 어떤 환경 속에 있을지 상상하면 손끝이 떨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남편에게 걱정으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힘찬 목소리로 “조심히 다녀오세요”라고 말하며 바람보다 먼저 배를 손으로 밀어 보내듯 마음을 실었습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봉원 씨였습니다. 배 위에서 그는 몇 번이고 아내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바람이 거세져도, 아내가 느낄 불안을 생각하면 더 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배는 다른 어선들보다 일찍 항구로 방향을 틀곤 합니다. 출항한 지 4시간쯤 지나면 남편은 자연스럽게 키를 돌립니다. ‘조금 덜 잡아도 괜찮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에게는 만선의 기쁨보다 아내가 무사한 얼굴로 맞아주는 순간이 더 소중했습니다.
궁평항에서의 삶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일도 흔들리고, 파도가 치면 하루의 벌이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날일수록 서로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묶었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버텨낸 시간이고, 바다에서 건진 것은 고기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을 지켜온 것이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가을철 꽃게가 풍년을 이루는 날이면, 점옥 씨는 남편을 떠올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수조 앞에서 그녀는 능숙하게 꽃게를 건져 올리고, 손님들에게 싱싱한 상품을 내어줍니다. 그 모든 일상이 서로를 위해 움직이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 값진 순간들입니다. 남편은 오늘도 바다에서, 아내는 항구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같은 목표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서로를 붙잡아준 시간들이 지금의 평온한 일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만선보다 큰 행복은 서로의 안부’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바다에서 얻은 것이 물고기가 아니라 서로를 지켜낸 시간이라고 말하는 봉원 씨의 마음은 누구보다 깊고 진합니다. 점옥 씨가 바라는 것도 단 하나,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는 얼굴을 보는 그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이 부부가 바다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궁평항의 가을은 오늘도 꽃게 냄새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는 이 부부가 함께 쌓아온 삶의 향기가 더 짙게 배어 있습니다. 삶의 풍랑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온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밑거름 삼아 꿋꿋이 일어선 부부의 이야기는 궁평항을 찾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남깁니다. 이곳의 바다는 단지 생계의 터전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고 단단해진 장소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늘도 바다와 항구에서 서로를 향한 믿음을 이어가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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